[권혜림기자] 뭇 관객들에겐 아직 낯선 얼굴일 수 있지만, 엄태구는 이미 영화계의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신예다. 굵직한 선이 돋보이는 마스크, 낮고 굵은 목소리를 지닌 그는 신인같지 않은 존재감으로 여러 작품을 누벼왔다.
지난 2012년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작품 '숲'(감독 엄태화)을 비롯해 장편 독립 영화 '잉투기'(감독 엄태화) 등에서 주연으로 활약했던 그는 장편 상업 영화 '무서운 이야기'와 '은밀하게 위대하게' '동창생' '인간중독' 등을 통해서도 관객을 만났다. KBS 2TV 드라마 '감격시대'로는 브라운관에서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현재 엄태구는 영화 '차이나타운'(감독 한준희/제작 폴룩스픽쳐스)을 통해 관객을 만나고 있다. 쓸모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차이나타운을 배경으로 두 여자의 생존법칙을 그린 이 영화에서 엄태구는 차이나타운의 질서를 지배하는 보스 엄마(김혜수 분)의 오른팔 우곤으로 분했다. 태어난 직후 코인로커에 버려진 여주인공 일영(김고은 분)을 향해 연민인지 사랑인지 모를 감정을 품은 인물이다.
조이뉴스24와 지난 2013년 '잉투기' 개봉 당시 만났던 엄태구는 영화 속 보여줬던 대범한 연기의 주인공이라곤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극심하게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적은 말수에 낯을 가리는 성격을 지닌 이 청년이 '충무로의 떠오르는 신예' 엄태구라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차이나타운'의 개봉을 맞아 다시 만난 엄태구의 표정은 한결 환해져 있었다. 여전히 수다스럽진 않지만 말수도 조금은 많아졌다. "더 밝아져도 좋을 것 같다"는 주변의 조언에 달라지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영화 속 또렷한 존재감은 변함이 없었지만 '인간 엄태구'의 모습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 액션이나 느와르가 아닌, 달달한 로맨스나 처절한 멜로를 연기하는 엄태구의 표정도 얼핏 상상이 된다. 이쯤 되면 그의 변화를 성장이라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차이나타운'의 제작 단계부터, 서사를 이끄는 두 여성 캐릭터 외에 주옥같은 남성 배역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풍문으로 떠돌았다. 김혜수와 김고은이라는 화려한 캐스팅 뒤, 우곤 역을 포함해 남자 캐릭터들을 향한 신인 남자 배우들의 경쟁도 치열했다. 엄태구는 경쟁을 뚫고 우곤 역을 맡게 된 것에 여전히 감격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오디션에서 떨어졌으니 경쟁률이 셌던 '차이나타운' 오디션 역시 당연히 안될 것이라 생각했었다"며 "'이 영화 정말 하고싶다'라고 생각하면 하면 늘 안됐었는데, 이렇게 오디션을 통해 정말 하고 싶던 작품에 들어오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처음 경험해 본 일이었다"고 돌이켰다.
"오디션은 제게 늘 '실패'와 '떨어짐' '떨림' 같은 기억으로 남았었어요. 그런데 '차이나타운'의 우곤을 연기하게 됐으니 이번 오디션은 너무나 소중하고 값진 경험으로 남았죠. 사실 오디션 당시엔 '된다, 안 된다'가 아닌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었었거든요. 저를 캐스팅해주신 한준희 감독님께 너무 감사한 일이죠. 사실 더 알려진 분을 캐스팅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텐데, 이렇게 끝까지 믿어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차이나타운'으로 강렬하게 데뷔한 한준희 감독 역시 충무로의 신인이다. 엄태구는 한 감독과의 작업을 "소통이 있는 현장"으로 떠올렸다. "이번 영화는 감독님만 믿고 했다"며 "제 머릿속에 드는 생각보단 감독님이 원하시는대로 연기하려 노력했고 믿고 따랐다"고도 말했다.
앞서 강렬한 이미지의 배역들로 스크린을 누볐던 엄태구는 '차이나타운' 속 우곤을 "지금껏 연기했던 강한 인물들과는 또 달랐던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일영을 향한 우곤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는 "감싸주고 싶고 보호해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우곤은 강한 인물이지만 일영을 말 없이 지켜주고 싶어 하는 캐릭터예요. 어떤 사랑의 감정에 무게감을 담은 이런 역할은 처음 연기해봤기 때문에 새로웠어요. 우곤은 일영을 마치 동생 대하듯 하지만 속으론 가족 이상으로 좋아하지 않았을까요? 과거에 연기했던 인물들과 우곤 사이의 차이가 또 있다면 이번엔 때리는 연기를 많이 했다는 점이죠. 그간은 주로 맞는 연기를 했으니까요. 연기할 때는 맞는 역이든 때리는 역이든 다 힘이 드는데, 그래도 영화를 볼 때는 맞는 것보단 때리는 것이 좋더라고요.(웃음)"
엄마 역을 연기한 배우 김혜수와 가까이 호흡하면서는 연륜 있는 선배 배우의 여유와 배려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뿐 아니라 제작보고회와 기자간담회 등 홍보 일정 중에도 김혜수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다는 것이 엄태구의 고백이다.
"김혜수 선배님은 워낙 베테랑이시잖아요. 심지어 영화 제작보고회 행사에서도 저를 끝까지 챙겨주시더라고요. 제가 간담회에서 질문에 답을 하며 '잘 한 건가?' 당황스러워하고 있을 때, 선배님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액션으로 제게 '잘 했어, 잘 했어. 말실수 아니니까 떨지 마'라고 격려해주셨어요."
엄태구가 영화계에 눈도장을 찍은 대표작인 '잉투기'는 친형인 엄태화 감독이 연출한 영화다. 참신한 시각과 완성도 높은 연출, 배우들의 호연이 더해져 호평을 얻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엄태구는 "'잉투기'가 다른 영화들의 캐스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선배님들이 '잉투기'를 잘 봤다고 이야기해주실 때는 너무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그걸 봤다니!'라는 생각에 정말 너무 좋더라"고 덧붙이며 진심으로 감격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잉투기' 이후 그가 '인간중독'과 '차이나타운' 등 상업 영화의 임팩트 있는 배역을 따낼 수 있었다면, 이제 '차이나타운' 이후의 엄태구를 그려나갈 차례다. 그는 "나 역시 다른 작품에서 또 어떤 내가 나올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떨리기도 하고 기대도 되죠. 어떤 배역이든 주어지면 최대한 열심히 할 준비가 돼 있어요."
한편 '차이나타운'은 지난 4월29일 개봉해 상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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