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소설]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 <14> - 정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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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뉴스24가 소설을 연재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브런치가 있는 카페에서 깊이와 재미를 더한 소설을 즐기며 하루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단편 「그림자와 칼」로 아침소설의 문을 연 정찬주 작가가 네 번째 작품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를 선보입니다. 이번에는 조금 호흡이 긴 중편소설입니다. 작품에 대한 설명은 정찬주 작가가 쓴 「작가메모」로 갈음합니다. [편집자]

자광스님은 오후 4시 30분쯤 돌아왔다. 마침 강헌과 운곡은 상선원 마루에 앉아 쉬고 있었으므로 자광스님을 바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각은 김룡사 허공에 수억, 수천 마리의 잠자리들이 군무群舞를 펼치는 때였다. 날개마다 햇살이 반사되어 마치 허공에 금가루를 뿌리고 있는 것 같은 장관을 연출하는 때였던 것이다. 마룻바닥은 니스 칠을 여러 번 해놓아 운곡의 머리처럼 반질반질했다.

운곡의 설명에 따르면, 허공에 금가루를 뿌리듯 나는 저 잠자리들은 해가 지기 전까지 군무를 펼친다고 한다. 일단 해가 지면 단 한 마리도 허공에 남지 않고 숲 속으로 사라져 버린단다. 좀 전에 잠자리 한 마리가 강헌의 팔에 내려와 앉는 순간 잡으려 하자, 운곡이 이렇게 말렸었다.

"날갯짓할 힘이 소진돼서 내려와 쉬는 겁니다."

그러니 미물을 잡지 말라는 사뭇 어른스러운 운곡의 말이었다.

"김룡사 허공에서 저렇게 신명나게 날다가 힘이 떨어지면 스님들 목이나 어깨에 내려 쉬었다가 다시 난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운곡의 머리에 머리핀처럼 앉았다 가는 잠자리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날갯짓할 힘이 떨어진 것은 잠자리만이 아니다. 강헌 자신도 삶의 힘이 소진된 채, 저 허공에서 잠자리가 자신의 팔에 내려앉았듯 김룡사를 찾아온 것이 아닌가.

허공에 금가루를 뿌리듯 혼신의 힘으로 나는 잠자리의 저 날갯짓. 운곡의 말을 빌리자면 저것도 김룡사가 보여주는 허공의 법문이란다. 효용가치를 따지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저 날갯짓이야말로 무의미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잠자리 떼는 일몰직전의 찰나지만 오히려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해가 곧 떨어지기 전의 짧은 순간이지만 목숨을 내놓고 나는 저 미물들의 처절한 날갯짓이야말로 불가에서 얘기하는 선이 아니겠는가.

"대단하지요?"

방에서 간편한 승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자광스님이 강헌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말한다. 강헌의 마음속에서까지 나는 잠자리 떼를 자광스님도 본 것이리라. 그런 자광스님이 운곡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운곡아. 솔차와 송이를 좀 가져오너라."

"네, 스님."

어머니 49재 때 이후 10여 년 만에 다시 보는 자광스님이다. 그때는 강헌이나 자광스님이나 40대 초반으로 면도한 턱이 파르스름한 나이였다. 동안이어서 그런지 잔주름이 많은 강헌보다 자광스님이 더 젊게 보인다. 목소리도 그때나 지금이나 힘이 있어 우렁우렁한다.

"잘 오셨습니다. 김룡사에서 푹 쉬고 가십시오."

"고맙습니다."

"사업은 잘 되십니까? 보살님 49재 때 크게 시주를 해주셔서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재를 지내고 남은 것으로 비가 줄줄 새던 향하당과 해우소 지붕을 다 고쳤습니다."

"가끔 스님을 뵙고 뭔가 좀 보탬이 되려고 했습니다만 생각만 그러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강헌의 말은 진심이었다. 어머니의 영靈이 극락왕생하도록 염불을 해준 김룡사이기 때문에 가끔 시줏돈을 보내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가 지나고 어느새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작가메모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는 십여 년 전에 썼던 작품이다. 어느 해 가을날 김룡사를 다녀온 뒤 그 절의 풍경이 너무 쓸쓸해서 그런 적막한 분위기를 화폭에 담듯이 그려본 작품이다. 지나친 슬픔이나 기쁨은 목을 메이게 한다. 그런데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쓸쓸함도 목을 메이게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그런 적막 속에서는 하루도 살지 못할 것 같은데 그곳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잘 견디고 있었다. 식사하는 여러 스님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에게 이 작품을 딱 한 번 보여준 기억이 난다. 한 선생은 그때 '자네도 이제 소설 귀신이 됐구먼.'하고 웃으셨던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을 일기 쓰듯 썼기 때문에 완성도나 작품성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작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은 사사로운 경험적(불교적) 소재를 차용한다 해도 문학적 보편성을 담아내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사숙한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나 이노우에 야스시의 「후다라쿠 항해기」 같은 작품들은 지금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작가로서 도달해 보고 싶은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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