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소설]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 <17> - 정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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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뉴스24가 소설을 연재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브런치가 있는 카페에서 깊이와 재미를 더한 소설을 즐기며 하루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단편 「그림자와 칼」로 아침소설의 문을 연 정찬주 작가가 네 번째 작품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를 선보입니다. 이번에는 조금 호흡이 긴 중편소설입니다. 작품에 대한 설명은 정찬주 작가가 쓴 「작가메모」로 갈음합니다. [편집자]

다시 자광스님을 만나기 위해 상선원으로 올라가기 전이었다. 범종 소리를 듣는 순간 강헌은 누구에겐가 그 소리를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천왕문 쪽에서 보니 말없는 그 노스님이 고적하게 범종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뎅에엥 뎅에뎅 뎅에뎅.

강헌은 범종 소리에 이끌려 봉명루로 갔다. 노스님은 범종도 공양을 하듯 덤덤하게 치고 있다. 그저 무심히 칠 뿐 아무런 군더더기의 표정이 없다. 스님이 쓸쓸하게 보였던 것은 아마도 스님의 나이에서 느껴지는 음영 탓이리라. 대개 범종을 치는 스님은 젊은 스님이라고 한다. 그런데 김룡사에서는 노스님이 범종을 맡아 치고 있는 것이다.

경내의 공중전화에 동전을 넣고 송화기를 대어주면 저 범종 소리를 서울까지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내나 딸에게도, 그 가난한 시인에게도 저 범종 소리를 보내주고 싶은 것이다. 무슨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나 그냥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사무친다.

사람이, 그것도 가족이 그리운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인생 농사를 참혹하게 망쳤다는 시인을 위로해주고 싶은 것도 처음이다. 오히려 자신이 위로받을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범종 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이 그것의 여운처럼 넓고 깊어지는 느낌이다.

타종을 끝내고 오는 노스님과 마주쳐 인사를 하지만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피하듯이 가버린다. 그러니 그럴수록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 노스님이 어느 당堂에 머물고 있는지 모른다. 공양시간에만 만났을 뿐 어느 곳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노스님이다.

날은 금세 어두워져버린다. 강헌은 서둘러 상선원으로 올라갔다. 자광스님은 강헌을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찻물을 준비해놓고 참선하듯이 정좌하고 있는 것이다. 방을 들어서자 벽에 걸린 사진 한 점과 10호 가량 되는 유화 두 점이 먼저 눈에 띈다. 그 중에서도 강헌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김룡사를 그린 유화이다. 절의 일부를 그렸지만 전경全景의 느낌을 주는 인상파적인 화풍의 서양화이다. 대상을 하나씩 단순화시켜가면서 마침내 화가는 김룡사의 푸른 적막을 그린 것 같다.

"저 그림 좋지요?"

"참 마음이 편해집니다."

자광스님은 그림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출가 전, 중학교 때 미술선생의 잔심부름으로 미술도구를 챙기거나 팔레트를 씻거나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미술선생이 학도호국단비나 잡부금을 대주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학생에게는 그런 잔심부름도 선택받은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 미술선생의 딸은 동창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미술선생의 그 딸이 저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가 십 수 년이 흐른 뒤, 자광스님이 김룡사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대구에서 가져왔더라는 스님의 이야기다.

"우리 선생님이 왜 김룡사를 그렸는지 너무 감사할 뿐입니다. 그 김룡사에 제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누렇게 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준다.

"이건 1955년도 초등학교 때 이곳 김룡사로 수학여행 와서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내가 김룡사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몇 년 전에 보내왔습니다."

작가메모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는 십여 년 전에 썼던 작품이다. 어느 해 가을날 김룡사를 다녀온 뒤 그 절의 풍경이 너무 쓸쓸해서 그런 적막한 분위기를 화폭에 담듯이 그려본 작품이다. 지나친 슬픔이나 기쁨은 목을 메이게 한다. 그런데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쓸쓸함도 목을 메이게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그런 적막 속에서는 하루도 살지 못할 것 같은데 그곳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잘 견디고 있었다. 식사하는 여러 스님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에게 이 작품을 딱 한 번 보여준 기억이 난다. 한 선생은 그때 '자네도 이제 소설 귀신이 됐구먼.'하고 웃으셨던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을 일기 쓰듯 썼기 때문에 완성도나 작품성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작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은 사사로운 경험적(불교적) 소재를 차용한다 해도 문학적 보편성을 담아내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사숙한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나 이노우에 야스시의 「후다라쿠 항해기」 같은 작품들은 지금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작가로서 도달해 보고 싶은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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