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바람의 손길이 느껴진다. 목덜미가 움츠러들 뿐 아니라 뼛속까지 으슬으슬한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탑을 더 찍겠다고 남는다.
동광이 또 말한다.
"강 사장님, 성공하십시오."
성공, 성공이란 말을 얼마나 많이 되뇌며 살아왔던가. 50대의 강헌에게는 추상적인 그것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날은 '성공'이란 말에 몹시 염증을 느꼈던 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광이 말하는 '성공'은 왠지 진부하지가 않다. 자신의 앞날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 같아 찡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강헌도 자신의 말이 적절한지 어떤지 생각해보지 않고 말했다.
"수행 잘해서 성불하십시오."
두 사람은 달빛에 훤히 드러난 대웅전 앞에서 헤어졌다. 내일이면 동광과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강헌은 생각하며 악수를 했다.
동광이 떠난다고 하니 김룡사가 조금은 허전해질 것 같다. 말동무 한 사람이 떠나가니 그만큼의 빈자리가 생길 것이기에 그렇다. 솔직히 운곡처럼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인생을 슬쩍 엿보았고, 그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춥기도 하여 강헌은 대웅전으로 들어가 마루 끝에 놓인 방석을 끌어다가 앉았다. 부처님을 바로 보려고 그 앞에 앉은 것이다. 과연, 부처님 이마를 자세히 살펴보니 노랑나비가 한 마리 앉아 있다. 깊어가는 이 가을에 나비를 본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러나 김룡사 법당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불가에서는 모든 일이 인과법에 의한 필연이라고 한다니까. 그렇다면 저 노랑나비는 강헌에게도 한 소식을 전하려고 부처님 이마에 앉아 꼼짝을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헌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또 누군가의 소리가 나직이 들려온다. 헌아, 나비의 소식을 네 지식으로 알려고 하지 마라. 여시관이면 된다. 차라리 네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왜 거기 앉아 있느냐는 것이다.
동광이 떠난다고 쓸쓸해하지 마라. 너도 떠나야 할 사람 아니냐. 그런데도 너는 김룡사에 영원히 남을 사람처럼 말을 하는구나. 나비는 지금 또다시 바깥세상을 나가려고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이지 부처님 이마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란다.
순간, 강헌은 놀라면서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이 김룡사에 남는다면 가장 무능력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법문도, 염불도 할 줄 모르고, 범종도 칠 줄 모르지 않는가. 진정 떠나야 할 사람은 자신이다. 김룡사에는 회사를 살릴 그 어떤 방편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헌을 오래도록 위로해줄 그 무엇도 없다. 어머니에 대한 희미한 추억의 조각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부처님 이마에서 힘을 모은 나비가 법당 바깥의 차가운 숲 속으로 다시 날아가듯 나도 김룡사를 떠나야 한다. 서울로 되돌아가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강헌은 부처님 앞에서 합장을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작가메모 -「김룡사에서 나비를 보다」는 십여 년 전에 썼던 작품이다. 어느 해 가을날 김룡사를 다녀온 뒤 그 절의 풍경이 너무 쓸쓸해서 그런 적막한 분위기를 화폭에 담듯이 그려본 작품이다. 지나친 슬픔이나 기쁨은 목을 메이게 한다. 그런데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쓸쓸함도 목을 메이게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그런 적막 속에서는 하루도 살지 못할 것 같은데 그곳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잘 견디고 있었다. 식사하는 여러 스님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에게 이 작품을 딱 한 번 보여준 기억이 난다. 한 선생은 그때 '자네도 이제 소설 귀신이 됐구먼.'하고 웃으셨던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을 일기 쓰듯 썼기 때문에 완성도나 작품성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작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은 사사로운 경험적(불교적) 소재를 차용한다 해도 문학적 보편성을 담아내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사숙한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나 이노우에 야스시의 「후다라쿠 항해기」 같은 작품들은 지금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작가로서 도달해 보고 싶은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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